송이의 노란 우산
글쓴이 : 정영철 ()
      조회 : 327회       작성일 : 2003-06-20 22:31  
송이의 노란 우산

(작은 미소 통신. 제 126호)

송이 엄마는 시장 좌판에 앉아 나물을 팔았다. 일곱 살 송이는 아침밥을
먹고 늘 엄마를 따라 시장에 나갔다. 어른들만 있는 시장에서 송이의 유일
한 친구는 까만 때로 얼룩진 인형뿐이었다. 머리까지 듬성듬성 빠져버린 인
형은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엄마, 저 할아버지 너무 무서워. 할아버지 옆에 가면 이상한 냄새가
나."
송이는 멀지 않은 곳에 힘없이 서 있는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엄마 뒤로
숨어버렸다. 칠십이 넘은 할아버지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할머니와 함께 시
장에서 채소장사를 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할아
버지는 슬픔으로 온종일 술만 마시고 아무 데서나 쓰려져 잤다. 할머니 병
원비로 할아버지는 산동네 집까지 모두 잃고 말았다. 시장 사람들은 말했
다. 할아버지가 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잊지 못해서
라고….
술에 취한 할아버지는 대낮에도 방앗간 옆 땅바닥에 쓰러져 코를 골았
다. 시장 사람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예전처럼 대해주지 않았다.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할아버지에게 막말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장 입구에는 가게를 지으려고 파헤쳐 놓은 길이 있었다.
어느 날 송이는 그 앞으로 뛰어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송이가 넘
어지는 순간 들고 있던 인형이 깊이 파헤쳐진 웅덩이로 떨어져버렸다. 인형
이 떨어진 곳엔 썩은 물이 고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더러운 물에 빠져서 다리만 간신히 내민 인형을 바라보던 송이는 그만 울
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송이는 훌쩍거리며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손가락
으로 인형을 가리켰다.
떠름한 낯빛으로 지나칠 뿐, 더러운 물로 들어가 인형을 꺼내주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닭집 아저씨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
다.
"왜 울어, 송이야."
"아저씨…."
송이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저건 안 돼, 송이야. 더러운 물 만지면 병 걸려. 엄마한테 인형 사주라
고 아저씨가 말해줄게."
송이는 억지로 팔을 끄는 닭집 아저씨를 따라갔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야…."
뒤를 돌아보았을 때, 송이의 눈은 금세 휘둥그래졌다. 술에 취한 할아버
지가 몸을 비틀거리며 인형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신발
을 신은 채 냄새나는 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 인형을 주웠다. 할아버지
는 인형에 묻어 있는 더러운 물을 때 절은 옷으로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다치지는 않았냐?"
"네…."
송이는 서먹한 대답에도 할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도깨비 뿔처럼 마구 헝
클어진 할아버지의 하얀 머리가 송이는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저녁부터 가을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송이는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어둑
해진 시장 길을 바쁘게 걸었다. 비를 맞고 누워 있을 할아버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방앗간 뒤쪽 처마 밑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는 비바람으로 얼굴까
지 온통 젖어 있었다. 송이는 자기가 쓰고 있던 노란 우산으로 잠든 할아버
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에 얹은 채, 멀리 엄마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
다. 그런데 송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람에 날아가 버린 노란 우산이
할아버지 옆에 벌렁 누워서 동그란 얼굴을 땅에 비비고 있었다. 송이는 서
둘러 할아버지에게로 다시 달려갔다.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노란 우산이 날아갈까 봐. 송이는 할아버지 옆
을 떠날 수 없었다. 노란 우산 밖으로 나와 있는 할아버지의 새까만 팔을
노란 우산 안으로 끌어당기며 송이는 말했다.
"할아버지, 비 와요.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송이는 여귀꽃처럼 가는 팔로 비에 젖은 할아버지 다리를 처마 밑으로 힘
껏 당겼다. 할아버지의 때묻은 손을 송이는 꼭 잡고 있었다. 때 절은 손이
지만 더러운 물에 빠진 송이 인형을 꺼내준 고마운 손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할아버지의 눈가로 따스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
렸다. 젖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던 송이 눈가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
다.
멀리 엄마가 있는 곳에서 조그만 불빛이 붉은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에선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송이는 엄마 옆에서 때 절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
다. 그때 닭집 아저씨가 등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송이에게로 다가왔다.
"송이야, 선물이다."
"아, 예뻐라…."
예쁜 인형을 받아 든 송이 눈가엔 어느새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송이야, 저기 봐. 이 인형, 할아버지가 힘들게 일해서 사주신 거야."
닭집 아저씨가 손으로 가리킨 곳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개
나리꽃처럼 활짝 피어있는 노란 우산을 흔들며 송이를 향해 활짝 웃었다.
할아버지가 끌고 있는 낡은 손수레에는 펼쳐진 종이 상자들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그날 이후로 시장 사람들은 못 쓰는 종이 상자를 하나하나 모아 할
아버지에게 주었다. 할아버지도 더 이상 술 취해 비틀거리지 않았고, 길 위
에 쓰러져 있지도 않았다.

더럽고 냄새난다며 모두 다 할아버지를 멀리 할 때, 어린 송이는 말없이
다가가 할아버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외로움과 절망으로 아무렇게나 살아
가던 할아버지는 송이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 이철환 님. 연탄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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