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얼굴
글쓴이 : 정영철 ()
      조회 : 418회       작성일 : 2003-05-02 01:11  
우리들의 얼굴

(작은 미소 통신. 제 119호)

석규 씨는 중학교 다니는 아들의 생일 선물을 들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도중에 그는 길을 건너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육교로 올라갔다. 그때 그
의 앞에 술에 취한 어떤 노인이 곡예를 하듯 육교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
다. 난간을 잡고 간신히 올라가는 노인의 모습이 너무 불안해 보였다. 만
일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노인은 큰 변을 당할 게 틀림없었다. 석규 씨는
얼른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조심하셔야 돼요. 여기서 넘어지시면 큰일나요."
"…."
고개도 못 가눌 정도로 술에 취한 노인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석규 씨는 노인을 부축했지만 술에 취한 사람을 부축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의 한 손엔 아들에게 줄 선물까지 들려 있었
다. 간신히 육교의 계단을 올라가기는 했지만 내려가는 일이 더 난감했다.
노인은 이제 해면처럼 풀어진 몸을 석규 씨에게 전부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노인의 팔을 자신의 목에 감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
려왔다.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노인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지갑이 계단으
로 떨어졌다. 석규 씨는 매우 난감했다. 허리를 숙여 지갑을 주워보려 했지
만 노인을 부축한 채로는 불가능했다. 그는 앞에 걸어가고 있는 학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학생, 나 좀 도와줘. 학생!"
차림새가 불량해 보이는 학생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뒤도 돌아보지 않
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더 큰 목소리로 학생을 불렀다.
"학생…. 여기 지갑 좀 주워줘. 내가 주울 수가 없어서 그래."
이번에는 잠깐 얼굴은 돌렸지만 학생은 이내 다시 앞을 보며 관심 없다
는 듯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날카로운 눈매에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이었
던 학생이 그는 욕이라도 해주고 싶을 만큼 괘씸했다. 다행히 뒤에 오던 아
주머니의 도움으로 떨어진 지갑을 주울 수 있었고, 노인도 무사히 육교를
건너 왔지만 석규 씨의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일요일 오후 아들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아들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왔다.
"안녕하세요?"
"그래, 어서들 와라. 이렇게들 와줘서 고맙구나."
석규 씨와 그의 아내는 친구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
이 일어났다. 아들의 친구들 중 한 명이 지난밤 집 앞 육교에서 보았던 바
로 그 아이였던 것이다. 그 아이는 석규 씨를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그
도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아이를 잠시 바라보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날 밤 석규 씨는 아들의 방으로 갔다.
"영민아, 오늘 집에 온 친구들 다 같은 반이니?"
"같은 반 아이도 있고 학교가 다른 아이도 있어요. 왜요?"
"아니, 우리 영민이가 어떤 친구들하고 지내나 궁금해서…. 사람은 친구
를 잘 사귀어야 하거든. 친구 잘못 사귀면 착한 사람도 결국은 잘못된 길
로 빠지고 말아."
"아빠, 제 친구들 모두 착해요. 공부도 잘하구요."
"그래? 근데 말야 제일 나중에 온 친구는 어때?"
그는 육교에서 아무 말 없이 가버렸던 아이에 대해서 넌지시 물었다.
"재석이요? 걔가 공부 제일 잘해요."
"세상을 사는 데 공부 잘하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사람 됨됨이가
착해야지."
"아빠… 재석이 정말 착해요."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르는 거야."
석규 씨는 당장이라도 지난밤의 일을 아들에게 알려주어 그런 친구는 가
까이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 문제 때문에 아이가 상처
받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석이라는 애, 지금 너하고 같은 반이니?"
"아니오, 다른 학교 다녀요. 그런데 아빠, 재석이 너무 불쌍해요. 요 아
래 육교 건너편에 사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새벽마다 신문을 돌리거든
요 게다가 어릴 때 사고로 청각을 잃어서 들을 수 가 없대요. 사람들이 말
하는 입 모양을 보고 겨우 알아듣거든요."
석규 씨는 그제야 자신이 도움을 청했을 때 아이가 그냥 가버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러자 낮에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아이에게 상처를 준 일이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진실은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껏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
로만 옳고 그름을 말해왔다. 두 눈 부릅뜨고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가 눈
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작은 것인가.

- 이철환 님. 연탄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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